[정인호 객원기자 칼럼] 실손보험 간편화…건강보험 보장률 제고 뒤따라야

[정인호 객원기자 칼럼] 실손보험 간편화…건강보험 보장률 제고 뒤따라야



국민건강보험공단 현석. (사진=국민건강보험공단 제공)

국민건강보험공단 현석. (사진=국민건강보험공단 제공)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이 최초로 법제화된 것은 1963년이다. 그러나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강제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조금씩 적용 범위가 확대되다가 전 국민에게 보편화된 것은 1989년이다. 최초에는 조합방식이었으나 국민건강보험공단(공단)으로 통합됐고 산하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을 두어 진료비의 적정성을 평가하도록 했다.


병원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공단으로부터 받는 돈을 ‘수가’라고 하며 엄격히 통제된다. 필수적인 서비스를 대상으로 급여를 제공하며 치료 효과가 불확실하고 경제성이 낮거나 불요불급한 서비스에 대해서는 비급여 대상으로 지정한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점차 커지는 것에 비례해 건강보험의 보장성도 강화됐다. 초기에는 보조금에 불과해 막상 중병에 걸렸을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점차 커버리지와 급여 수준이 올라갔다. 총 진료비에서 건강보험이 차지하는 비율인 보장률은 2021년 64.5%에 이른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77%보다 한참 낮다.


그러다 보니 급여 중 본인부담금과 비급여를 커버해주는 실손보험이 활성화됐다. 재정 지원을 줄이려는 정부가 민간보험을 통해 가입자에게 부담을 전가한 것이다. 현재 정부는 매년 건강보험 예상 보험료 수입의 20%를 지원하도록 되어 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실손보험은 각 보험사가 자기방식으로 판매해 난립됐으나(1세대) 2009년 표준약관이 제정됐다(2세대). 보험가입금액 한도를 정하고 자기부담금을 도입해 과도한 이용을 억제했다. 2017년에는 과잉 진료 가능성이 높은 ‘도수치료’ 등을 특별약관에 편입시켜 보험료를 차등화했다(3세대).


이러한 조치는 병원의 과잉 진료와 환자의 의료 쇼핑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좀처럼 시정되지 않는다. 그러자 정부는 2021년 4세대 실손보험을 도입, 비급여에 대해 의료 서비스 양에 따른 할증제를 도입하고 자기부담률을 높였다. 지난해 기준 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3997만명에 이른다. 민간보험이라는 점만 빼면 제2의 건강보험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양상은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정부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건강보험제도의 보장률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점점 더 많은 의료 서비스가 급여 대상이 되고 가격이 정부로부터 통제되자 병원은 환자들에게 비급여 서비스 이용을 유도하고 촉진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추구했다.


정부의 통제로 실손보험의 보장성이 하락하고 가입자의 부담이 늘고 있으나 과거 판매했던 상품의 영향도 있고 편법도 늘어 과도한 의료 서비스 이용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손해보험사들이 실손보험으로부터 입은 손실은 2020년 2조 4229억원에 이르며 손해율은 131%에 달한다.


최근 국회에서는 보험법 개정을 통해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서비스를 도입하려고 한다. 현재는 가입자가 직접 병원에서 서류를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 번거롭고 복잡하므로 신청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소화 서비스가 시작되면 병원에서 전자문서 형식으로 필요 서류를 중간 기관을 경유해 보험사에 보내게 된다. 언뜻 보험금 청구를 전산화하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험사는 쌍수를 들어 찬성하고 병원은 결사 반대를 외치고 있어 갈등이 첨예하다.


전산화된 형태로 진료의 세부 데이터가 축적되면 보험사는 이를 활용해 수익성을 올리려고 할 것이다. 가입이나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지금보다 가입자에게 불리한 형태로 상품이 설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병원의 입장에서는 데이터가 외부에 축적돼 비급여 의료 서비스에 대한 가격 통제로 돌아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 상당한 수익을 비급여로부터 얻고 있는 상황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따라 중간 기관을 심평원으로 하는 것은 물론, 보다 중립적인 보험개발원으로 지정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보험사나 병원의 입장은 수익성에 기준을 두고 있고 가입자에 대한 배려는 찾을 수 없다. 건강보험제도의 원칙은 가급적 좋은 의료 서비스를 낮은 가격에 제공함으로써 가입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재원을 통제하는 것에 두어야 옳다. 그 과정에서 보험사 및 병원과 타협하고 적정한 수익성을 보장할 수는 있지만 원칙 자체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보험법 개정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우선 실손보험금 간소화 서비스 도입은 불가피하다. 정보화 시대에 일일이 종이 서류를 떼서 처리한다는 것은 효율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가입자의 불편과 보험금 청구 포기를 유도한다.


보험사의 악용을 막기 위해서는 영수증·진료비 세부 내역 등의 전산 자료를 심평원에 보내어 관리하도록 하고 보험사에는 보험금 지급에 필요한 서류만을 비전자적 형태로 보내는 방안이 적절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개인 정보의 유출도 방지할 수 있다.


심평원이 관련 자료를 확보하게 되면 비급여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분석해 향후 합리적인 가격 책정에 활용할 수 있다. 현재 비급여 서비스는 병원마다 천차만별이며 적정성을 판단할 수 없다. 의료는 공공성을 가지는 서비스이므로 과도한 수익 추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부담은 일차적으로 보험사가 지지만 종국적으로는 가입자의 몫이 된다. 실손보험 가입자 중에서도 일부가 과도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나머지 가입자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면서 부담만 지는 꼴이 된다.


종국적으로는 건강보험제도의 보장률을 올리는 것이 답이 될 것이다. 비급여 서비스 중 필수성이 강한 것을 가급적 급여 서비스로 끌어온다면 가입자가 과도하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부담을 지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병원이 비급여에 몰두하는 풍선효과도 줄어들 것이다. 심평원은 상세한 데이터를 이용해 과도한 이용을 제어할 수 있다. 미용 등 건강과 크게 관련 없는 서비스만을 실손보험에서 커버하도록 하면 가격이 시장에 의해서 결정되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에 근접하면서도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OECD 평균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논의는 재정 긴축에 집중되고 있다. 건강보험을 기금화해 의회에서 통제하자는 주장이 그 예이다.


이는 고령화에 따라 의료비가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보장성은 후퇴할 것이며 국민들은 비싼 민간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공적 의료비는 줄지 모르지만 과잉 진료와 높은 가격으로 전체적인 의료비는 더욱 폭증할 것이다.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등 보험법의 개정은 건강보험 보장률의 제고라는 최종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이뤄져야 한다. 단순히 보험사와 병원의 이해관계를 적당히 조정하는 식으로 처리된다면 본말은 전도되고 의료 서비스는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정인호 객원기자 프로필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 경제학 박사 ▲KT경제경영연구소 IT 정책연구 담당(상무보) ▲KT그룹 컨설팅지원실 이사 ▲건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낸 경제 및 IT 정책 전문가

정인호 객원기자 yourinh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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